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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보레 창업주 듀란트, "110년 전 포드를 인수하려고 했는데..."

  • 기사입력 2021.01.27 06:50
  • 기자명 양봉수 기자

- 유복한 집안에서 사업가 재능을 타고난 듀란트
- GM 창업 직후, 엄청난 인수합병 단행
- 쉐보레 성공으로 지엠 복귀했지만 다시 쫓겨나
- 정작, 자신의 이름을 건 듀란트 모터스는 실패로

[오토트리뷴=양봉수 기자] GM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쉐보레 브랜드의 역사는 윌리엄 크라포 듀란트(William Crapo Durant, 이하 듀란트)가 루이스 조셉 쉐보레(Lois-Joeph Cheverolet, 이하 루이스 쉐보레)에게 사업제안을 하면서 시작된다. 1911년 11월 3일,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 쉐보레 브랜드를 공동 창업하고, 1년 만에 출시한 클래식 식스 (Classsic Six)를 성공 시킨다. 그러나 루이스 쉐보레는 고성능차를 만들고 싶어 했고, 듀란트는 대중적인 차량을 원하면서 두 사람의 갈등이 깊어진다. 
 
▲윌리엄 크라포 듀란트의 초상화(사진=위키피디아)


듀란트는 금수저도 아니고, 다이아몬드 수저

듀란트는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금수저’도 아니고, ‘다이아몬드 수저’쯤 되겠다. 일단 외할아버지의 직업은 미시간주 주지사, 미시간주 상원의원 등을 지냈고, 미국의 남북전쟁이 시작될 때쯤에는 미국에서 가장 큰 목재회사를 소유하기도 했다. 고등학생 시절 듀란트는 할아버지의 목재 창고에서 일하기 위해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마차 회사 사장, 자동차를 만들기로 결심하다”

20대 중반에는 조시아 댈러스 도르트(Josiah Dallas Dort)와 동업으로 플린트 로드 카트 회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자본금 2천 달러를 가지고 시작했지만, 금세 200만 달러로 불어났다. 듀란트의 회사는 1900년대 미국에서 가장 큰 마차 회사가 됐다. 
 
하지만 당시 듀란트는 자동차에 대해 시끄러운 엔진 소리와 연소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연료의 악취가 본질적으로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부의 약한 규제로는 일반 국민들의 분노를 해결할 수 없으니, 안전을 개선할 수 있는 새로운 교통수단을 직접 만들기로 결심한다. 
 
▲1905년 판매했던 뷰익 모델 C(사진=뷰익)


1904년, 뷰익(Buick) 인수

1904년 11월 1일, 경영난을 겪던 뷰익(Buick)을 인수한다. 차를 만들기 위해 회사를 만든 게 아니라, 회사를 샀다. 당시 뷰익은 굉장히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이 때문에 듀란트는 뷰익을 저렴하게 인수해서 이미 갖춰진 시스템에 투자하는 편이 더 빠르다고 판단했다. 듀란트의 판단은 적중했다. 결국 뷰익은 포드(Ford), 캐딜락(Cadillac), 올즈모빌(Oldsmobile) 등의 판매량을 앞서며, 분위기 반전을 성공시켰다. 1905년 열린 뉴욕 오토쇼에서는 모델도 몇 가지 없는 상황에서 당시 최고 수준인 1,100대를 계약 받기도 했다. 
 
▲1908년부터 1938년까지 사용됐던 GM의 초기 CI(사진=Logopedia)


1908년, 제너럴모터스(GM) 설립

듀란트는 뷰익을 통해 캐나다에서 가장 큰 마차회사인 R. S. 맥러플린(McLauglin)에 15년 동안 엔진을 공급하는 계약을 체결한다. 동시에 듀란트는 자회사를 통제할 지주 회사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1908년 9월 16일, 듀란트와 맥러플린은 함께 에스크로 계좌를 개설하고, GM을 설립한다.
 
듀란트는 같은 해 12월 곧바로 올즈모빌(Oldsmobile)을 인수하면서 빠른 속도로 몸집을 키웠다. 결국 부품부터 완성차까지 모든 라인을 갖춘 제조사로 통합되며, 이어서 캐딜락과 폰티악(당시 오클랜드 자동차) 등을 계속 인수 합병한다. 
 

1909년, 포드(Ford) 인수 제안

굉장한 속도로 GM의 몸집을 키우던 듀란트는 카터카(Cartercar) 인수 이후, 가장 큰 경쟁사였던 포드의 인수를 결심한다. 벌써 뷰익, 올즈모빌, 캐딜락, 폰티악, 카터카까지 5개의 완성차 브랜드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이미 카터카의 실패와 현금 부족으로 GM이 힘든 상황이었다. 하지만 은행은 듀란트의 거래 주선을 거절했고, GM 이사회 역시 듀란트를 쫓아냈다.
 
▲뷰익 소속의 선수 시절, 스티어링 휠을 잡고 있는 루이스 쉐보레(사진=deansgarage)


1911년, 루이스 쉐보레와 만남

듀란트는 GM에서 쫓겨나자마자, 투자자들을 모아 리틀 오토모빌(Little Automobile)을 설립했다. 이 회사는 플린트 왜건 웍스(Flint Wagon Works)를 저가에 인수해 기반 시설을 갖추고 있었고, 엔진은 듀란트 소유의 스털링에서 공급받아 즉시 생산이 가능했다. 리틀에서 생산한 제품들에 대한 평가는 나쁘지 않았지만, 소송 등 외적인 문제도 있었고, 듀란트는 더 강력한 회사를 필요로 했다. 
 
GM을 함께 설립했던 맥러플린은 듀란트가 필요한 자금을 끌어왔다. 듀란트는 자동차 기술과 차량에 대한 지식이 많으며 뷰익 레이싱팀의 드라이버로 활동 중이던 루이스 쉐보레에게 사업제안을 한다. 루이스 쉐보레 역시 성공에 대한 욕심이 컸기 때문에 이 제안은 바로 실행으로 옮겨진다. 
 
▲쉐보레 최초의 자동차 클래식 식스(사진=쉐보레)

1년 만에 개발한 쉐보레 클래식 식스(Classic Six)는 4.9리터 6기통 5인승 투어링 모델로 시속 105km까지 주행이 가능했고, 2,510달러의 가격에 불티나게 팔렸다. 그러나 듀란트와 루이스 쉐보레가 추구하는 방향은 너무나도 달랐다. 듀란트는 포드 모델 T를 이길 수 있는 대중적인 차량을 원했고, 루이스 쉐보레는 고성능차를 개발하고 싶어 했다. 결국 둘의 만남은 3년도 지나지 않아 깨지게 된다. 
 

1916년, GM의 지배권 되찾고 또다시…

듀란트는 쉐보레를 떠나는 루이스 쉐보레의 지분을 모두 매입했고, 쉐보레가 성공적으로 성장하는 덕분에 1916년에는 GM의 지배권을 되찾게 되었다. 이후 1918년에는 쉐보레를 GM으로 편입 시키고, 바디 빌더 업체인 피셔 보디(Fisher Body)를 인수하며, 심지어 가전업체 프리가다이어(Frigidaire Appliance Company)를 자회사로 두기도 한다. 듀란트가 계획했던 대로 GM은 지주사로써 수많은 브랜드를 거느리고, 작은 부품부터 다양한 브랜드의 완성차까지 판매한다. 
 
▲좌우 각각 1925년, 1924년의 듀란트 모터스 지면 광고(사진=Pinterest)


1921년, 듀란트 모터스의 깜짝 등장

GM의 지배권을 되찾고, 또다시 무리한 인수, 합병을 거듭한 결과일까. 듀란트는 결국 두 번째 해고로 GM에서 다시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 그러자 듀란트는 GM을 이길 수 있는 회사를 다시 만들고 싶어 했다. 쉐보레를 통해 GM을 되찾은 경험이 있었던 듀란트는 당연히 자신이 있었다. 1921년 듀란트가 새로운 브랜드로 설립한 듀란트 모터스는 캐나다 공장에서 다양한 모델을 출시했다. 
 
다양한 계층을 공력 하면서 포드 모델 T와 경쟁하기 위해 스타(Star)를 내놓고, 이외에도 플린트(Flint), 럭비Rugby), 메이슨(Mason Truck) 등 수많은 차량을 출시한다. 이 모델들 역시 회사들을 인수하면서 생겨난 모델이었다. 
 
그러나 GM에서 활약했던 것과 달리 한계는 분명했다. 전부 듀란트 모터스에서 생산한 완제품이 아닌, 외부 부품을 받아 조립된 차량이라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회사의 구조는 GM과 동일했고, 가격도 역시 비슷했다. 게다가 1929년 월스트리트가 무너지면서 대공황에 빠지게 되었고, 월가의 큰 손이었던 듀란트도 대량의 주식과 듀란트 모터스 등의 손실이 중첩되면서 결국 1933년 파산에 이르게 됐다. 


듀란트의 재력, 사망과 동시에 끝나

듀란트 모터스가 파산하기 전인 1920년대 후반 듀란트는 세 번째 부인을 위해 미시간 주 로스커먼에 개인 저택과 전용 활주로 공사를 시작했다. 말이 저택이지, 실제로는 방이 54개나 있는 성에 가까웠다. 하지만 1931년 듀란트가 인정하지 않았던 듀란트 모터스 노조원들에 의해 불타버리면서 듀란트는 입주를 해보지도 못하고, 재산을 날리게 됐다. 
 
듀란트는 사업이 망하고 나서도 연금을 당시 1만 달러, 최근 통화를 기준으로는 약 18억 원 이상을 매년 받았다. 이 연금으로 다시 볼링장, 패스트푸드, 광산 등 사업을 지속하다 사망했다. 사실 연금만 하더라도 굉장한 금액이지만, 1947년 듀란트가 사망할 무렵에는 듀란트 가족이 파산해서 의료비를 낼 돈이 없어 귀중품과 그림 등의 현물 자산까지 전부 매각해야 했다.

bbongs142@autotribun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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