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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보레, 모터스포츠에 대한 창업주의 열정 속에 태어난 브랜드... 그리고 충격적인 결말

  • 기사입력 2021.01.29 03:05
  • 기자명 양봉수 기자

- 자전거와 자동차에 관심이 많았던 쉐보레
- 북미로 이민 후, 모터스포츠 스타 등극
- 듀란트와 쉐보레 창업 했으나 이는 잠시 뿐
- 연속된 사업의 실패 결국은...

[오토트리뷴=양봉수 기자] 루이스 조셉 쉐보레(Lois-Joeph Cheverolet, 이하 루이스 쉐보레)는 국제 모터스포츠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자동차에 대한 기술력까지 갖춘 인물이었다. 공통 창업자였던 윌리엄 크라포 듀란트(William Crapo Durant, 이하 듀란트)는 이미 뷰익과 제너럴모터스(이하 GM) 등을 설립했고,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본이 충분한 투자자였다. 앞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던 둘의 만남은 1911년 11월 3일 쉐보레 설립을 시작으로 본격화된다.
 

자전거와 자동차에 관심이 많았던 유년기

루이스 쉐보레는 1878년 12월 25일, 스위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조셉 펠리시엔 쉐보레는 스위스에서도 시계 제조 중심지였던 뉴샤텔의 칸톤 라쇼드퐁에서 일하던 시계 제작자였다. 하지만 1886년 쉐보레 일가는 프랑스 동부에 위치한 부르고뉴(Beaune)로 이주를 했다. 부르고뉴는 프랑스 와인의 주요 산지 중 하나로, 형편이 넉넉지 않았던 집안 형편 탓에 루이스 쉐보레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와인 생산 공장에서 일을 시작한다.

와인공장에서는 와인을 다른 통으로 옮겨 담는 디캔딩 과정의 속도를 높여주는 펌프를 설계했는데, 이때부터 아버지에게 영향을 받는 기술적인 감각이 발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전거를 좋아해서 10대에는 자전거 수리점에서 인턴으로 일했다. 여기서는 변속기의 구조를 개선하는데 몰두했으며, 18세부터는 파리에 위치한 모흐(Mors)자동차에서 일했다. 기술적인 재능과 기계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루이스 쉐보레에게 모흐자동차는 더 큰 꿈을 심어줬고, 루이스 쉐보레는 결국 1900년 캐나다로 이민을 떠난다.
 

▲루이스 쉐보레의 뷰익소속 선수 시절(사진=위키피디아)


루이스 쉐보레, 모터스포츠로 스타 덤에

루이스 쉐보레가 캐나다로 이민을 결정한 건 더 많은 자동차 기술을 익히고, 프로 드라이버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자동차 회사였던 프랑스 드 디옹-부톤(De Dion Bouton)의 엔지니어로 고용되면서 미국 뉴욕으로 다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이후 1905년에는 피아트(Fiat)에서도 비슷한 일을 했다.

루이스 쉐보레는 유년시절부터 자전거 경기와 모터스포츠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모터스포츠에 대한 갈증은 실제 참가로 이어졌고, 평균 시속 109.7kkm 기록해 국제 모터스포츠계의 유명 인사가 됐다. 신인 드라이버가 곧바로 스타가 된 셈이다. 이를 눈 여겨본 뷰익 모터스포츠팀은 1908년 루이스 쉐보레를 드라이버로 고용했다. 바로 여기서 듀란트와의 만남이 처음 시작된다. 루이스 쉐보레는 뷰익에서 디자인을 배우고, 엔진 설계도 시작하면서 드라이버지만, 엔지니어의 역할을 해내며, 역량을 키워갔다.


윌리엄 듀란트의 솔깃한 사업제안

루이스 쉐보레를 영입했던 듀란트는 1910년 돌연 GM에서 쫓겨났다. 듀란트의 과도한 야심이 문제라는 주주들의 반발 때문이었다. GM으로 복귀가 가장 이상적이지만, 복귀를 못하더라도 새로운 사업을 성공시켜야 했던 듀란트는 루이스 쉐보레에게 함께 자동차 회사를 설립하자는 제안을 했다. 듀란트는 GM에서 축출됐으나, 여전히 자본이 충분한 백만장자이자 사업가였고, 뷰익에서 일하던 루이스 쉐보레도 자동차 시장에서 더 큰일을 하고 싶었다. 루이스 쉐보레에게 이 제안은 당연히(?)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루이스 쉐보레의 첫 양산차 클래식 식스(사진=위키피디아)

두 사람은 곧바로 1911년 11월 3일, 루이스-조셉 쉐보레의 이름을 딴 쉐보레를 설립하게 된다. 1년 만에 개발한 쉐보레 클래식 식스(Classic Six)는 4.9리터 6기통 5인승 투어링 모델로 시속 105km까지 주행이 가능했고, 2,510달러의 가격에 불티나게 팔렸다. 

이후 1913년 쉐보레에 처음 적용되기 시작한 보타이 로고는 루이스 쉐보레가 파리에서 머물던 호텔 벽지에서 가져왔다는 설과 고국인 스위스를 기념하기 위해 선택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지만 이런 설을 확인할 틈도 없이 루이스 쉐보레와 듀란트의 동업은 사업 3년도 채우지 못하고 끝나고 말았다. 

드라이버이자 엔지니어 출신인 쉐보레는 모터스포츠에서 성적을 낼 고성능 자동차를 만들고 싶어 했지만, 사업가였던 듀란트는 대중에게 판매할 차량을 원했기 때문이다. 결국 듀란트가 1913년 루이스 쉐보레의 지분을 인수하면서 루이스 쉐보레는 자신의 이름과 로고 등을 회사에 남겨둔 채 쉐보레를 떠났고, 듀란트는 이를 바탕으로 GM의 경영권까지 다시 찾아 1918년 쉐보레와 GM을 합병한다.
 

▲1916년 형제들과 함께 한 루이스 쉐보레(사진=쉐보레)


쉐보레 지분 매각, 그 이후

쉐보레 지분을 매각한 루이스 쉐보레는 1914년 형제들과 함께 포드 모델 Ts의 레이싱 부품을 만들기 위해 프런테낙(Frontenac Motor Corporation)을 설립했다. 루이스 쉐보레는 프런테낙을 통해 알루미늄을 대폭 사용한 바디에 차동기어잠금장치(LD) 같은 기술을 접목해 당시에는 혁신적인 차량을 제작했다. 루이스 쉐보레는 개스톤 쉐보레는 모터스포츠에서도 순위권을 유지하며 순조로운 출발을 알렸다. 그러나 함께 회사를 만든 개스톤 쉐보레는 1920년 인디애나폴리스 500에 참가해 우승까지 했으나, 후반기 레이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후 루이스 쉐보레는 1926년 아더 쉐보레와 함께 쉐브롤에어(Chevrolair 333)이라는 회사를 설립해 경비행 엔진을 개발하기도 했으나, 형제간의 사이가 틀어지면서 다시 문을 닫게 되었다. 인디애나 폴리스에서 쉐보레 에어 카 컴퍼니(Chevrolet Air Car Company)를 차리기도 했지만, 경제 위기로 폐업을 해야만 했다.
 

▲프런테낙 시절의 루이스 쉐보레(사진=쉐보레)


루이스 쉐보레, 그가 다시 돌아간 곳은...

여러 번의 사업 실패에도 10기통 레이디얼 엔진의 특허 신청은 포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시대는 어렵고, 몸도 좋지 않았다. 1933년 그는 다시 엔지니어로 일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의 회사는 바로 미국 디트로이트에 위치한 쉐보레 생산라인이었다. 쉐보레가 설립되고, 루이스 쉐보레가 22년 동안 회사를 떠나 있던 사이 이미 쉐보레는 800만 대가 넘는 차량이 출고되었을 정도로 거대한 기업이 되어 있었다. 복귀할 당시 쉐보레에는 함께 창업했던 듀란트도 없었고, 듀란트는 이사회에서 두 번째로 쫓겨나면서 창업했던 듀란트 모터스 폐업으로 힘들었던 시기였다.

1935년에는 특허 승인이 났지만, 이미 1934년부터 루이스 쉐보레는 뇌졸증을 앓아 사업을 할 여력은 물론 일을 제대로 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결국 1941년 6월 6일 63세의 나이로 디트로이트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망 전 미국의 한 기자가 루이스 쉐보레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한다. “쉐보레 브랜드 때문에 루이스 쉐보레가 유명했던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라고 생각하는지?” 이에 루이스 쉐보레는 미소를 지으며, “각각 조금씩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내가 제일 처음에 있었는데…”

bbongs142@autotribun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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